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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테스탄티즘 [라] Protestantismus [영] protestantism [독] Protestantismus

  프로테스탄티즘이란 말은 16세기 종교개혁운동으로 생긴 개신교(改新敎)를 총칭하는 것이다. 이 말은 1529년 독일 스파이에르(Speyer)에서 모인 국회에서 루터 편에 선 소수의 독일군주들과 다수를 이룬 로마 가톨릭 교회 편의 군주들이 다수결에 따라 통과시킨 결의에 대하여 전자가 ‘프로테스트’(protest)한다고 말한 말이며 이 말의 뜻은 ‘항의한다’는 것이다. 루터 편의 군주들의 프로테스트한 그 결의의 내용은 루터교회에 불리한 것이었다. 즉 가톨릭교회에 속한 군주들의 영지 안에서는 개신교의 예배의 자유를 부여하지 않고 개신교에 속한 군주들의 영지에서는 가톨릭 신자들에게 예배의 자유를 부여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프로테스탄티즘이란 말이 개신교의 명칭이 된 역사적 연유를 말하는 것인데, 이 명칭이 개신교의 성격을 표현하여 주는 말로서 일반적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루터 자신이나 다른 개혁자들은 프로테스트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았다. 루터가 쓰기 좋아한 말은 ‘assertion’ 곧 ‘확언’(確言) 또는 ‘단언’(斷言)이라는 말인데 에라스무스(D. Erasmus)와의 자유의지에 관한 논쟁에서 많이 썼으며, 이 말은 그의 저서 ≪자유 의지의 노예신세≫에서 자주 나온다.

  루터를 비롯한 16세기의 종교개혁자들은 로마 가톨릭 교회의 교리와 제도와 생활을 개혁하기 위하여 자기들의 주장을 분명히 했는데, 이것이 프로테스트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프로테스탄트 개혁자들의 신학적 입장은 대동소이하지만 가장 현저한 차이를 드러낸 것은 성 만찬(성체성사)의 신학이었다. 특히 루터의 소위 공체론(共體論, con-substantiation)과 스위스의 츠빈글리(H. Zwingli)의 단순한 기념론 사이에는 논쟁도 있었으며, 칼빈(J. Calvin)의 중도적 입장이 양자의 입장의 접근을 시도했던 것이다.

  그 밖의 문제에 있어서는 주류파 개혁자들 사이에 공통된 신학적 입장이 확립되어 있었으므로 프로테스탄티즘의 원리를 아래와 같이 간추려 볼 수 있다. 성 전례(성사)는 성 만찬과 세례(성세) 두 가지로 줄이며, 견진성사는 세례의식에 포함되며, 종전의 교회법을 폐기하고 교회를 신도 중심의 자발적이고 자치적인 공동체의 모임으로 정의한다. 또한 만인사제(滿人司祭)(1베드 2:9)의 원리에 입각하여 목사(신부)와 평신도 사이에 종교적 및 사회적 계층 차이를 두지 않으며, 목사와 신도 대표들이 개체 교회를 자치와 자급의 원리에 서서 운영해 가며, 교회제도는 전통과 선호에 따라 감독제도나 장로제도나 회중제도(會衆制度)를 택할 수 있게 한다. 그리고 교회와 국가의 관계는 협력관계를 유지하되 각자의 영역의 독립과 자유를 보장받게 하며, 이 모든 것보다 더 중요한 공통적 원리는 사람이 자기의 행위와 공로의 도움이 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복음을 믿음으로써 의롭게 되는 교리(로마 1:17)이며, 다음으로 성서의 하느님 말씀의 권위를 교회나 전통이나 회의(會議)의 권위 위에 두게 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프로테스탄티즘은 일반적으로 성서주의 종교가 되었는데 그것은 단순히 성서 책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고 성서의 내용을 두고 하는 말이었으며, 성서적인 교회를 재현시키려는 노력은 초대 교회의 재현을 일삼으려는 것이었다.

  프로테스탄티즘은 이렇게 성서를 높이면서 성서의 방역(邦譯)을 장려하여 누구에게나 성서를 읽고 해석하며 가르치는 자유를 부여하였다. 이렇게 하여 각자가 성서를 통하여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응답하여 믿고 살아가는 훈련을 시행하였으므로 각자가 자기의 신앙을 형성해 갔으며, 교회와 신부와 목사에게 의존하는 경향이 줄어들었다. 즉 각자의 경건한 노력에 따라 성령과 은혜와 구원을 받는 자주적인 신앙생활을 신도들이 익혀 갔으므로 프로테스탄티즘은 개인주의 형식의 종교가 되었다는 평을 받게 되었다. 따라서 신앙동지들의 자유로운 결사를 통한 교파의 형성도 용이하였고 또 기존 교파의 분열도 잦게 되었다.

  16세기에 종교개혁운동으로 생긴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주류로는 독일의 루터교회와 스위스의 츠빈글리와 칼빈의 운동이 통합되어서 탄생한 개혁교회(Reformed Church)와 그리고 이 두 교회보다 더 급진적인 개혁을 일삼은 자유교회(Free Church)에 속하는 소수의 분파들(재세례파 · 메노나이트파)이 있었다. 이 자유교회의 특징은 교회의 전통적인 제도와 의식과 교리에서 과감하게 탈피하고, 교회와 국가의 엄격한 분리를 주장하며, 교회를 완전히 신앙동지의 자발적인 결사로 간주한 점이다. 후대에 이와 비슷한 소종파들이 영국과 미국 등지에 여럿이 생겼고 루터교회와 칼빈의 개혁교회가 이 자유교회를 박해하였다. 루터교회는 주로 독일과 유럽 여러 나라로 펴져갔고, 개혁교회는 스위스를 기점으로 하여 독일 · 프랑스 · 영국 · 스코틀랜드 · 벨기에 · 네덜란드 등으로 퍼져 갔다. 영국에서는 헨리 8세가 가톨릭 교회 신앙을 계속 고수하였고, 다음의 에드워드 16세가 프로테스탄티즘을 받아들였다가 그 다음의 메어리 여왕이 다시 가톨릭 신앙으로 복귀하였으나, 다음의 엘리자베드 1세가 오늘의 영국국교인 앵글리컨교회(Anglicanism, 성공회)를 확립하였는데 이 교회의 제도와 의식은 가톨릭 교회에 방불하지만 신학과 신조는 프로테스탄티즘에 방불하여 중도적인 교회가 되었다. 스코틀랜드에서는 1560년 이후로 칼빈주의 신학과 제도를 본뜬 교회가 국교로 인정되었다.

  프로테스탄트즘 교회 안에서 분파작용이 많았던 것은 주로 칼빈주의 교회였다. 엘리자베드 1세가 영국 국교를 확립하였을 때 이 교회의 개혁을 더 진전시키려 한 것은 칼빈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1652년에 와서는 나누어져서 장로파 · 침례파 · 감독파 · 독립파 등으로 분열되었다. 이들이 청교도(淸敎徒)라고 불렸던 까닭은 영국교회의 개혁을 증진시켜서 보다 더 간소한 교회를 만들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엘리자베드 1세는 이러한 청교도의 운동을 배척 · 억압하였기 때문에 회중교회 신도들은 네덜란드로, 그리고 1620년에는 미국 신대륙 동부지방으로 이주하여 갔으며 그들의 뒤를 이어서 프로테스탄트 교파들이 속속 미국으로 건너가서 프로테스탄트 대륙을 만들어 갔다. 영국에서는 장로교파 청교도들이 영국 국교를 물리치는 청교도혁명에 성공하여 1641년부터 장로교 공화국을 세워서 20년 동안 영국을 지배하다가 1660년 영국의 왕정 복구와 함께 영국 국교로서 종래의 앵글리커니즘이 복구되어서 오늘에까지 이르고 있다.

  18세기 이후로 프로테스탄트 신학의 자유주의운동과 함께 정치적 및 사회적 변동이 극심해 감에 따라 많은 교파들이 생기게 되었고 19세기 중엽 이후로 급격히 증진된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세계 선교운동은 미국 · 영국 및 유럽 여러 나라의 프로테스탄트 교파들을 선교지역에 확산시키게 되었다. 한국에 전파된 프로테스탄트 교회들도 이때에 들어 왔는데 이 경로는 다음과 같다.

  만주(滿洲) 동북지방에서 선교하던 스코틀랜드 장로교 선교사 로스(John Ross)의 전도로 기독교로 개종한 한국인 서상륜(徐相崙)과 그의 친구들 수명이 로스의 한국어 성서번역과 출판에 협력하여 마르코의 복음서와 루가의 복음서를 1882년에, 그리고 요한의 복음서를 이 이듬해에 그 곳에서 간행하였는데, 서상륜은 그 복음서들을 몰래 국내에 들여와서 그의 고향 황해도 솔내[松川, 九美島]에서 배포, 전도하여 1884년 11월에 이곳에 한국 최초의 프로테스탄트 교회당을 마련하였다. 이 해 9월에 미국장로교인 알렌(H.N. Allen)의사가 서울에 들어와서 의료사업을 계획하다가 왕실의 호의를 얻어 1885년 4월 10일에 광혜원(廣惠院)을 개원하였다. 미국장로교 선교부의 정식 파송을 받은 선교사 언더우드(H.G. Underwood) 목사와 미국 감리교의 정식 파송을 받은 선교사 아펜젤러(H.G. Appenzeller) 목사와 그의 부인이 1885년 4월 5일에 인천에 상륙하였으며 그들의 뒤를 이어 두 교파의 남녀 선교사들이 속속 들어오게 되었다.

  1901년에 4개의 주한 장로교 선교회의 연합기구인 선교공의회가 조직되었다. 즉 미국 북장로교 선교회, 미국 남장로교 선교회, 호주 장로교 선교회, 캐나다 장로교 선교회는 한국의 단일 장로교를 세울 것을 결의하고 모든 선교사업에 있어서 협력하게 되었으며, 1905년에는 장로교 선교회들과 감리교의 두 선교회가 선교협의회를 조직하여 초교파적인 협력을 약속하였다. 그 밖의 교파로는 성결교 · 안식교 · 침례교가 있었으나 각각 독립적으로 활약하였다. 장로교와 감리교의 선교협의회는 연합사업으로서 대한기독교서회(1890년), 성서공회(1896년), 기독교청년회(1903년), 여기독청년회 등을 설립하여 선교와 계몽 사업을 추진하였다. 한국의 프로테스탄트 선교사들은 한국인의 애국심을 포착하여 구한국 황제와 국가에 대한 애국심을 후원하였다. 1896년 고종황제의 생신축하 예배를 대한기독교서회의 후원으로 드렸을 때 하객들이 운집한 가운데 영국 국가의 가사를 본뜬 찬송가를 지어서 황제의 만수무강을 노래하였다. 이것은 프로테스탄트 선교에 도움이 되었으며, 일본의 한국 침략이 점점 노골화해 갔을 때 많은 우국지사들이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또한 프로테스탄트 선교사들은 구한말에 개화와 혁신을 주장한 진보주의 지도자들을 후원하면서 그들의 개종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1894년 갑오경장 이후로 박해를 받던 개화파 인사들 중에 투옥된 명사들을 개종시켜서 이상재(李商在) · 이승만(李承晩) · 김동식(金東植) 등 한국 교회 평신도 지도자들을 육성하였다. 선교초기부터 프로테스탄트 선교회들은 배재학당 · 이화학당을 비롯하여 서울 · 평양 · 대구 · 부산 · 원산 · 전주 등지에 학교들을 세워서 현대교육을 시작하였고 또 시골에는 주간과 야간 학교를 만들어서 한글과 생활지식을 가르쳤다. 그 밖에도 한국 근대화운동에 보탬이 되는 많은 사업과 운동을 전개하였다. 한국 프로테스탄트 교회는 이와 같은 한국 근대화운동에의 참여를 통하여 한국의 혁신파 지도자들과 민중들을 그리스도교를 개종시키는 데 큰 효과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선교사들의 태도와 정책이 급변하기 시작한 것은 구한국 정부가 한국의 자주적인 국권수호가 어렵게 되어 가고 일본 세력이 청국과 러시아의 세력을 한국에서 축출하는 일에 성공한 후로 한국에 대한 내정간섭이 더욱 심해 갔을 때 미국과 영국과 그 밖의 서양국가들이 일본의 대 한국정책을 묵인하거나 시인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주한 프로테스탄트 선교사들이 한국의 독립과 주권에 대하여 동정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두 가지 염려를 가지고 있었다. 그 하나는 선교사들이 모국정부의 대 한국정책에 위배되는 일을 할 때 생길 수 있는 충돌이었고, 다른 하나는 한국 교회의 신도들이 지나친 민족주의적 정치관심을 가질 때 교회가 정치장소가 되거나 일본 총독정치의 무자비한 탄압을 받게 되면 교회의 원래의 사명이 실패로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염려였다. 요컨대 선교사들의 입장이 난처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1901년 장로교 선교공의회는 한국의 교인들과 목사가 정치운동에서 손을 뗄 것과 교회당과 목사관이 정치운동의 장소가 되는 것을 금하라고 한국 프로테스탄트 교회에 요청하였다. 이렇게 하여 한국 프로테스탄트 교회는 선교 초기와는 달리 정치에서 물러서는 교회가 되어 갔다. 그러하여 주로 민족주의적 정치운동에 관심을 가지고 교회에 나왔던 신도들 가운데는 떨어져 나간 사람도 많았으며 신도들 가운데는 선교사들을 미워하여 폭행을 가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프로테스탄트 교회와 교회가 세운 학교와 기독청년회에는 민족주의 정신과 운동이 언제나 살아 있어서 일본관헌의 감시를 계속 받게 되었다.

  한국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항일정신과 운동은 한국 근대사를 화려하게 장식하게 된다. 1911년에 날조된 일본총독 데라우찌(寺內正毅) 암살음모사건에 연루된 사람 105인 중에 80명 이상이 프로테스탄트 교회 지도자들이었고, 기미년 3.1독립운동, 때 33인 민족대표 중에 16명이 프로테스탄트 목사와 장로와 집사들이었다. 그 운동을 마지막까지 이끌고 간 사람은 함태영(咸台永), 이갑성(李甲成) 등 장로교 신도들이었고, 또 이 독립만세운동에서 불탄 수원 제암리교회 사건을 비롯하여 가장 피해를 많이 입은 단체는 프로테스탄트 교회였다. 이 독립만세운동을 계기로 교회의 위신과 권위가 드높아지면서 교회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개종한 사람들의 수가 급증하였고 그리스도교 서적들의 판매실적도 급증하였다.

  한국 프로테스탄트 선교사들의 선교정책은 장로교회가 채용한 네비우스(Nevius)정책을 감리교회도 어느 정도 채용하였는데 그것은 자전(自傳)과 자치(自治)와 자급(自給)과 자기표현(自己表現)이었다. 자전은 한국인 교인 각자가 자기 생업에 종사하면서 무보수로 이웃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원칙이다. 선교 초기에는 선교사의 수도 적고 그들의 한국말도 서투르고 또 그들에게서 교육받은 사람도 극소수였던 때인 만큼 이 자전 원칙이 전도의 적절한 방법이었다. 자치원칙은 한국 교인의 힘으로 세워서 운영할 수 있는 한도에서 교회를 영위하게 하는 방법이었다. 이것은 개체교회가 선교 초기에 힘에 알맞게 착실하게 성장하도록 하는 방법이었다. 자급원칙은 외국선교비에 의존하지 않고 개체교회가 자력으로 전도인들에게 생활비를 제공하는 방법이었다. 가난했던 교회의 신도들은 전도자에게 돈과 식량과 화목을 제공하면서 자기들의 생활력의 한도 안에서 자급해 갔으며, 전도인도 신도들의 생활정도 이상을 바라지 않았다. 자기표현 원칙은 교회당을 한국 건축기술에 따라 한국식으로 세우는 방법이었다. 네비우스 선교원칙은 앞으로 교회가 성장하여 감에 따라 수정될 수 있는 것이었으며 또 그 후 부분적으로 수정되어 갔다. 대체로 이 선교원칙은 한국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토착화와 자주성을 키워주면서 성공적으로 교회 성장을 이룩하게 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한국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양적 및 질적 성장에 이바지한 것은 성서공부와 부흥집회였다. 선교 초기부터 교회는 성서공부의 조직적인 방법을 세웠다. 교회마다 성서공부반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선생은 선교사나 본토민 선생의 성서공부반에 가서 배워 왔다. 또 부흥집회기간에는 반드시 성서공부시간을 마련하여 참석자 전원에게 성서를 가르쳤다. 그리고 각도의 중심지에 성서학교를 세워서 교회에서 파견된 신도들에게 2개월 이상 성서를 가르쳐서 돌려보냈으며, 그들은 돌아가서 교회의 성서선생이 되곤 하였다.

  부흥집회는 1903년 소수의 선교사들이 원산에서 자신들의 심령의 부흥을 기도한 것이 한국 교인들에게까지 번져감으로써 시작되었고, 1907년 평양에서 큰 부흥집회를 열었을 때 여러 가지 종교적 경험이 나타났으며 그 후로 부흥집회를 전국적으로 전개하여 많은 개종자들을 얻었다. 교회들은 대체로 매년 한 두 번의 부흥집회를 가졌으며 이 집회를 ‘사경회’라고 불렸는데 성서공부하는 집회라는 뜻이었다. 전도설교 시간은 매일 저녁에 한 번 있었다. 이 부흥집회는 교회성장을 물론이고 그리스도 교인들의 초교파적 친교와 협력을 도왔고, 일제시대에는 한국인의 친목과 단결과 민족의식을 일깨워 주었다. 부흥집회는 신앙의 정서를 키워주며 각자의 종교적 경험과 성장을 위하여 각자가 자발적으로 노력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소수의 부흥사와 그들의 추종자가 탈선하여 신앙과 윤리에 있어서 과오를 범한 일이 있었으나 교회적으로 큰 타격은 없었다.

  일제말기에 총독부는 소위 ‘내선일체’(內鮮一體) 정책의 일환으로 신사참배(神社參拜)를 한국인 전반에 강요하면서 프로테스탄트 교회와 학교에도 강요하였을 때 교회는 저항하고 나왔다. 1938년 평양의 장로회신학교 · 숭실전문학교 · 중고등학교들은 불복을 선언하고 폐교를 당하였다. 여러 지방의 노회들도 반대운동을 펴는 가운데 목사와 장로들과 일반신도들이 강제적으로 신사에 끌려가기도 하였으며 더러는 투옥되었다. 일본정부는 신사참배를 국가의식이라고 설득하려 했으나 교회는 그것을 우상숭배로 간주하였다. 그러나 장로교회와 감리교회는 일본경찰의 감시와 강요에 따라 총회를 열고 비법적으로 신사참배를 결의하였다. 개체교회들은 그에 순종하지 않고, 성결교회 · 안식교회 · 구세군교회는 전적으로 교회문을 닫아 버리기까지 하여 저항하였다. 이때에 주기철(朱基徹) 목사를 비롯하여 신사참배 반대자 50여 명이 순교하였다.

  광복 후의 한국 교회의 실정은 그 전과는 많이 달라졌다. 첫째 일제말기에 신사참배 주동자들을 비롯한 불가피한 여러 친일적인 세력에 대한 반대파 세력이 교권을 장악하려 하였고, 뉘우침과 화목을 주장한 구세력도 뜻을 이루지 못하였으며, 장로교 및 감리교는 각각 심각한 분열과 논쟁에 휘말렸었다. 장로교에서는 일제말기 신사참배 문제로 복역하다가 출옥한 사람들의 규합세력이 오랜 분쟁 끝에 분열되어 독립교단을 만들었으며, 감리교는 신구 두 세력 사이가 교권장악 문제로 갈라졌었다. 그리하여 프로테스탄트 교단들은 해방 전부터의 단일교단의 일치를 상실하기 시작하여 계속된 신학논쟁과 교권분쟁으로 1960년 전후에 거의 양분(兩分)되었으며, 감리교단만이 일치를 회복하였다. 분열이 가장 심한 장로교회는 현재 40여 소교단으로 나뉘어져서 각기 신학교를 가지고 목사양성을 하고 있어 그 분열증은 자못 심각하다. 게다가 해방 후 미국으로부터 선교사업을 새로 시작하기 위하여 한국에 들어온 수많은 소교파들이 한국 프로테스탄트 교계의 친선과 일치를 더 어렵게 만들었으며 선교지역의 분담협정은 깨어졌다.

  한국전쟁을 계기로 일어난 신앙부흥운동들은 광복 전의 것과는 너무나 성격의 차이가 컸다. 박태선(朴泰善)의 종말사상을 기조로 한 부흥운동과 나운몽(羅雲夢)의 심령부흥과 성령강조를 기조로 한 부흥운동은 신도들을 열광주의로 이끌어 갔으며, 치병, 방언, 환상보기 등의 기적적인 힘과 경험을 강조하여 일반신도들을 심취시켰다. 부흥집회의 빈도는 크게 늘어나서 달마다 갖는 교회도 많아졌으며, 평소의 교회집회를 부흥사의 방법으로 인도하는 목사들도 많아졌다. 이러한 집회방법을 교회의 양적 성장의 효과적인 방책으로 채용하고 있는 교회가 많아졌다. 교파마다 교세의 2배 이상의 확장정책을 세움으로써 이 부흥집회적인 목회방법의 채용을 합리화시켰다. 이 방법에 의한 수련은 수많은 기도원에서 실시되고 있다. 교회 수의 증가와 신도수의 급증이 이러한 집회와 목회에 힘입고 있다는 것을 일반적으로 인정받고는 있으나 교회와 신도들의 신앙생활의 질적 저하를 초래하고 개교회주의적 전도와 선교가 사회적 관심을 무시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광복 직후부터 한국 프로테스탄트 교회는 외국선교사들 및 그들의 모교회에 대한 의존에서 벗어나는 정책을 서서히 펴 갔다. 교회의 선교비와 신학사상과 교권문제에 걸쳐 본토민 교회의 위신을 세우기 시작한 것은 교파에 따라 다르지만 한국전쟁의 피해로부터 벗어나 교회의 자력적 재건이 실현되기 시작한 때부터였다. 이제는 거의 모든 교파들이 교단운영과 신학교육과 선교정책 수립을 자주적으로 하게 되었고 선교사들은 협동자로서 일하고 있으며, 그들이 가져오는 선교비는 교단에 맡겨서 본토민 교회와 합의하여 사용하게 되었다.

  한국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일치 운동은 초기에는 외국선교회를 사이에서 이루어져 와서 경쟁적인 선교를 하지 않게 되었다. 1924년 국제선교협의회(I.M.C.)의 가명교단으로서 장로교회와 감리교회가 한국에서 조선기독교연합회를 조직하여 선교사업의 협력을 도모하였으나 일제말기 일본관헌의 압력으로 1938년 7월에 해체되었다가 1946년에 재건되었다. 1948년 세계교회협의회(W.C.C.) 창립총회에 한국의 장로교회와 감리교회가 가명교회로서 참석한 후 오늘날까지 한국교회협의회(N.C.C.K.)의 가명 7개 교단과 그리스도교 기관들이 일치운동을 펴고 있다. 그런데 이 교회협의회는 그 동안 두 방면에서 어려움을 겪었다. 첫째, 1970년부터 일어난 한국의 인권과 사회정의 운동에 한국 N.C.C.가 개입하게 된 후로 근로자들과 기독학생들, 그리고 사회참여로 고난을 받는 신도들과 목사들의 문제 때문에 정부와 충돌한 것이 많았으며 사실상 N.C.C.에서는 인권과 정의운동에 적극적인 사람들이 주도적이었기 때문에 교계의 일각의 비판을 피할 수 없었다. 다음으로 N.C.C.의 회원교단보다 더 많은 교단들이 밖에서 N.C.C.의 정책과 노선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는데 그것은 신학적으로나 정책적으로 보수적인 교단들의 비판이었다. 그들은 W.C.C.와 N.C.C.를 용공(容共)이라고 비난하였는데 이러한 교계의 충돌과 혼선은 한국사회 전체에서 볼 수 있었던 상황의 한 단면이었다. 아무튼 한국 N.C.C.는 한국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전체적인 대변자가 될 수 없었으므로 N.C.C.의 회원교단수보다 더 많은 수의 교단의 비공식 대표들이 나와서 한국 교회지도자협의회라는 것을 구성하였다. 아무튼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하나의 약점은 일치의 결여이다.

  한국 프로테스탄트 교회는 여러 가지 약점과 시행착오를 드러내고 있지만 현재 2만 5,000여 교회와 800만의 신도를 거느리면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산하 그리스도교 기관들과 단체들이 다양한 선교와 사회사업과 교육사업을 펴는 한편, 해외 여러 나라에 선교사들을 파송하고 있다. 이 거대한 에너지를 앞으로 잘 규합하고 바로 사용하게 하는 지도력이 확립되면 더 크게 성장하고 번영할 수 있는 교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李章植)

  [참고문헌] Deutscher Evangelischer Kirchenausschuss, Die Bekenntnisschriften der evangelisch-lutherischen Kirche B.Ⅱ, 1930 / E.F.K. Muller, Die Bekenntnisschriften der reformierten Kirche, 1903 / G. Schenkel, Der Protestantismus der Gegenwart, 1926 / V. Ferm, The American church of the Protestant Heritage, New York 1953 / P. Tillich, Protestantismus als Kritik und Gestaltung, 1929 / O. Dibelius, Das Jahrhundert der Kirche, 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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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아이콘 gybricync
2013-01-29 0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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